영화/한국영화

1987 영화 _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실화 이야기 정리

모나미연필 2017. 12. 10. 09:30
반응형

엄청나게 기대작이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바로 영화 1987이에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1987년 민주화 항쟁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담고 있다고 해요. 대학생 한명이 죽었고, 정부는 이를 숨기기 급급했죠.

오늘은 영화 1987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볼까 해요.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1987년 1월, 경찰 조사를 받던 스물두 살 대학생이 사망한다. 
증거인멸을 위해 박처장(김윤석) 주도 하에 경찰은 시신 화장을 요청하지만,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최검사(하정우)는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단순 쇼크사인 것처럼 거짓 발표를 해나가는 경찰.
그러나 현장 흔적들과 부검 소견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가리키고, 사건취재하던 윤기자(이희준)는 ‘물고문 도중 질식사’를 보도한다.

이에 박처장은 조반장(박희순)등 형사 둘만 구속시키면서 사건을 축소하려 한다.

한편, 교도소에 수감된 조반장을 통해 사건 진상을 알게 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은 이 사실을 수배 중인 재야인사에 전달하기 위해  조카 연희(김태리)에게 위험한 부탁을 하게 되는데..

 

감독은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지 궁금해지기도 하네요.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보면 매우 독특하면서도 거칠고, 또한 그 안에서 날카로운 부분들을 잘 담아내는 감독이라 더욱더 기대가 되고 있어요.

그리고 일단 배우 라인업이 엄청난것도 눈길을 끄는데, 언젠가는 한번 영화화가 되었지라는 것이 지금 이렇게 영화화가 되네요. 그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서 한번 알아볼까 해요.

'87년 6월 항쟁'. 전두환의 5공 군사독재에 항거하던 전국의 대학생들이 일어난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는 너무 유명해서 다들 알고 있을것 같네요. 그 발단이 되었던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987년 초에 일어난 일명 '탁억사건'이라고도 불리우고 있어요.

"당시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에요.

그런데 박종철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라고 하네요. 그리고 그해 2월,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문재인 대통령님이 당시 변호사 자격으로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연행이 되기도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문재인 대통령님에 대허서는 뒤에서 더 다뤄 보도록 할게요.

1987년 1월 13일 서울의 어느 하숙집에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들이 닥쳐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한 학생을 끌고 가게 되죠. 그들은 "박종운이 어디있는지 대라"라고 하는데 박종운은 민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인해 수배된 박종철의 선배였어요. 박종철은 박종운의 행방에 관해 끝내 답하지 않았죠.

이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이어졌고, 박종철은 끌려간 다음날인 14일에 사망을 하게 되죠. 이에 경찰은 박종운의 소재를 물으면서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윽"하는 소시를 지르며 쓰러졌다고 발표를 하는데, 당시 검안의였던 중앙대병원 오연상 교수는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제기 했고, 자신을 따라다니던 수사관의 눈을 피해 화장실에서 언론인들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 사실을 알렸죠.

여론이 들끓자 정두환 정권은 고문사실을 인정하고 경찰 두명만 구속을 한 뒤 사건을 마무리하게 하는데 하지만 이번엔 교도소에 있던 민주화운동가 이부영이 구속된 경찰이 울면서 "우리가 다 뒤집어 쓰게 됐다며"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게 되죠. 이부영은 주료고문자 셋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바깥동료에게 전달을 했어요.

고문자 이근안 / 경찰이었다가 퇴직을 하고 목사일도 하였었다

결국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1987년 1월 26일 김수환추기경은 아래와 같은 강론을 하였었어요.

창세기의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라들, 너의 제자, 저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탁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
라고 하면서 잡아 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 제단은 이어 같은 해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경찰의 은폐 조작 사실까지 모두 폭로를 하게 되는데, 이 즈음 시민들의 민주화투쟁 열기는 타로르기 시작을 했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사실 노무현전대통령님과 문재인 대통령님에게 절대 잊을수가 없는 사건일텐데,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문재인 대통령님은 1987년 2월7일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에 연행이 되기도 했었죠.

연행이 되었을때 당시에 노무현재단 산하 사료연구센터가 공개한 진술서에 따르면 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대부분 질의에 답변을 거부해 묵비권을 행사한 반면, 문재인 대표는 적극적으로 경위를 밝히면서도 연행의 부당성에 항의를 했다고 하네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은 부산 북부경찰서에서 작성한 1차 조서에서 "오늘 무엇을 했나", "군중을 선동하는 발언을 한 일이 있나" 등의 질문에 "말할 수 없다"는 답으로 일관을 했으나 문재인 대통령님의 경우에는 행사 참여와 연행 경위를 비교적 자세하게 진술했다고 해요. 연행 장소에 간 이유에 대해서도 "박종철군의 추모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라고 분명히 밝혔다고 하네요.

문재인 대통령님는 "집회에 대해 국민이 공감할 것으로 본다. 구경한 시민들도 마음 속으로 호응했을 것"이라고 진술한 후 "박군 사건을 참회해야 하며 개인적 불행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인권이나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 계기가 돼야 한다. 추모제는 정당한 요구인데 원천 봉쇄한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항의했다고 해요.

그리고 참 대조적으로 박종철 열사가 죽음으로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박종운은 2004년 4월.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에서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벌이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들 군사독재정권이 두려워 변호를 맞길 껴려했던 사건에서, 박종철의 변호를 맞은 변호사는 10.26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박원순 서울시장이에요.

그리고 검사 측의 검사는 보온통 사건으로 유명했던 안상수 였죠.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있습니다만, 당시 상관이며 사수였던 공안2부장 최 환 검사와 더불어 당시 정권이 시신을 화장하라는 외압을 뿌리치고, 부검을 지시하여 박종철 열사의 죽음은 우리에게 밝혀지게 되죠.

19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진상폭로를 한 주역이었다고 할수가 있어요. 그리고, 이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의 기자들이 기사화했고 이들은 퇴출당하게 되는데 퇴출당한 이들이 만든 신문이 한겨레 신문이에요.

그래서 문재인 대통령님은 한겨레 신분이 창간을 햇을때 2천만원을 후원하기도 했었죠. 그당시에 2천만원이면 지금으로는 2억원이 훨씬 넘는 자금이기도 하죠.


영화 1987 관련 포스팅 더보기


반응형